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흘러간 시간에 미련도, 후회도 갖지 않는 것.
아니, 후회하는 법을 아예 모르는 채로 사는 것.
하지만 지수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지수가 자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고, 붙잡으려 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수는 종종 사소한 우울에 시달렸다.
오늘도 그렇다. 뒤를 돌아보면 지수는 비행선의 조종도 내팽개친 채로 무언가를 궁리하고 있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갔다. 흰 종이 위에 지수가 잔뜩 채워넣은 문자들이 보였다. 지수는 머리로만 기억하는 것이 벅찰 때는 저렇게 종이 위에 기억들을 메모하곤 했다. 신기하고 합리적인 습관이다. 물론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습관이기도 하지만.
"한 행성에서 다음 행성으로 약 삼 개월…. 그러면 일 년에 많아도 네 번, 내가 120살까지 산다고 하면…."
그리고 지수는 종이에 적혀있는 숫자들을 몇 번이나 보고 또 보면서 셈을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메모란 건 편리하기도 하지만 망각의 힘도 있는 모양이라고. 문자로 형체화시키는 순간 머리는 그것을 기억할 의무를 지워버린다. 대신 그 하찮은 종이쪽지가 의무를 지는 것이지. 그래서일 것이다. 지수가 종종 '꼭 해야할 일!!!'이라고 굵게 쓰고 별표까지 잔뜩 쳐놓은 일들만 골라 까막 잊어버리는 것은.
p.30-31
인간은 눈을 뜰 때부터 언젠가 죽어야 할 공포를 몸에 지니고 있다. 공포라는 것은 물리적이거나 형체를 가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짐작할 수 없는 것,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 바로 공포인 것이다. 자기 자신과 헤어지는 그 공포와 지수는 한 몸처럼 지내온 것이다. 가엽다. 지수가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고, 붙잡으려 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아아, 그랬구나.
p.35
내가 사랑하는 건 유년기의 별이야.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어린별은 모든 게 불안정하고 가끔은 군데군데 폭발이 일어나기도 하지. 나에게 절대로 호의적이지 않아도, 난 그 미성숙을 사랑해.
그리고 넌 그 유년기의 별을 닮았어.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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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필터를 씌우는데 재미들린 요즘... 46페이지 정말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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